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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상대한 외교 지혜





이익주 역사학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익숙한 시조는 조선 건국 후 길재가 고려의 옛 도읍을 찾아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초장의 첫마디, ‘오백년’이다. 고려는 918년에 건국되어 1392년에 멸망했으니 정확하게는 474년을 지탱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500년 왕조는 매우 드물다. 막강한 군사력 때문 외환은행월복리 이었을까? 아니다. 고려는 주변 국가들에 비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 장수의 비결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외교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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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항전 고려 태자의 자진 방문 명분 부족한 쿠빌라이에게 큰 선물
섬·산성에 숨어 끈질긴 저항 병행 처인성 싸움서 살리타이 사살도
드라마 내생에 봄날인구 숨겨 혹독한 군량 요구 모면 몽골 천하의 유일한 독립국 지위 」



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 내전을 앞두고 고려 태자가 찾아가 협상하자 장차 고려의 보존을 약속했다. [사진 이익주]


10~14세기 개인돈 는 아시아 대륙에서 거란·여진·몽골 등 유목민족이 차례로 명멸하며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그때마다 국제질서가 격동했고, 그 여파가 고려에 미쳐왔다. 거란이 등장할 때 그 침략을 받아 항전을 벌였고, 몽골제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28년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고려는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하거나, 심지어는 수도를 옮긴 상태에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저축은행 싸웠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력이 거란이나 몽골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끈질긴 항전으로 국난을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을 뒤쫓아가 궤멸시킬 정도는 아니었고, 침략을 막으면서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그랬기 때문에 고려에는 협상 능력이 필수적이었고, 서희같이 유능한 외교관이 나올 수 있었다.
최강 몽골 기병 상대로 산성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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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의 한계산성. 1259년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어 내륙으로 진입하려는 몽골군을 이 산성에서 막았다. [사진 국가유산청]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진행된 대몽골 항쟁은 고려의 항전과 협상이 빛을 발한 전쟁이었다. 몽골의 강력한 기병에 맞서 고려가 채택한 전술은 산성·해도 입보책(入保策)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백성들을 산성(山城)이나 섬[海島]으로 대피시키고 몽골군과 싸웠다. 산과 섬이 많은 고려로서는 당시 세계 최강 몽골 기병을 상대하기에 최적의 전술이었다. 게다가 주요 산지에는 삼국시대 이래 산성이 수축되어 있었다. 산성 전투 승리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광주의 남한산성을 들 수 있다. 1232년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불리던 이곳에서 몽골군을 격퇴했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이 그대로 내려가 처인성(지금 용인)을 공격하다가 지휘관 살리타이가 사살당하고 철수한 일이 있었다. 한반도 중부 내륙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충주의 산성에서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둬 몽골군의 남진을 막았고, 전쟁 막바지이던 1259년에는 강원도 인제의 한계산성(寒溪山城)에서 몽골군이 동해안으로부터 진부령을 넘어 내륙으로 진입하려는 것을 막았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것도 산성·해도 입보책의 일환이었다. 고려는 전쟁 초기인 1232년 개경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강화 천도를 단행했다. 바다 폭이 1㎞ 정도밖에 되지 않고, 육지에서 뻔히 보여서 당시 몽골군이 “갑옷만 쌓아놓아도 건널 수 있다”고 한 데서 갑곶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이 가까운 섬의 피난 수도로서의 가치는 충분했다. 육지와 섬 사이 바닷물이 겨울에 얼지 않아 사철 배 없이는 건널 수 없고, 고려의 전함 수백 척이 섬을 호위하고 있어 수전을 하지 않고는 공격할 수 없었다. 서해바다는 물론이고 한강·임진강·예성강을 통해 육지와 교통이 닿을 뿐 아니라 물자를 운송할 수 있었다. 강화도 자체가 넓은 섬이어서 식량 자급도 가능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숨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육지의 전투상황을 보고받고 산성·해도 입보를 명령하며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적절한 대처를 해가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하지만 고려가 몇몇 산성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어떤 곳에서는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231년 철주성(평북 철산)에서 성이 함락되기 직전 지휘관이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창고 안에 가두어 불을 지르고 장정들은 모두 스스로 목을 벤 일이 있었다. 같은 해 평주(황해도 평산)에서는 성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자 몽골군이 성을 함락시키고 도륙해서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한 성에 있던 수백,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으니, 강화 천도와 산성·해도 입보책이 항구적인 대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했다. 그래서 고려는 항전과 더불어 협상을 벌였다.
무리한 요구엔 지루한 협상 작전



몽골은 1274년 일본 침략 때 고려군을 동원했다. 당시 일본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의 전투 장면. 단궁을 든 사람을 고려군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진 이익주]


협상에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몽골은 고려 국왕이 직접 몽골에 와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가시적인 조치로서 국왕이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했다. 고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의 항전과 협상은 불가능해지고, 고려의 명운을 온전히 몽골에 맡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가 항전을 계속하자 몽골은 공물을 바치고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협상 조건을 누그러뜨렸다. 이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려는 1239년부터 공물을 보내기 시작했고 1241년에는 종실 중에 한 사람을 왕자라고 속여 인질로 보냈다. 그 대가로 1253년까지 짧지 않은 휴전을 성사시켰다. 다시 몽골은 국왕이 강화도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는 강화도 바로 북쪽 해안에 궁궐을 짓고 국왕이 그곳에 행차함으로써 몽골의 요구를 이행하는 시늉을 했다. 고려에서 군대가 철수한 가운데 협상도 이렇듯 지지부진하자 몽골은 침략을 재개하면서 국왕이 몽골에 올 것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해왔다. 고려는 또다시 지루한 협상을 벌여 태자가 몽골에 가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는 데 성공했다. 국왕이 몽골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함으로써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확보한 것이었다.



고려궁지 강화도 천도 당시의 궁궐터로. 조선 정조 때 이곳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고려 태자는 1259년 4월 몽골을 향해 강화도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몽골의 뭉케 칸이 있던 리우판산(六槃山, 닝샤 회족자치구 소재)으로, 1만리나 되는 먼 길이었다. 이 여정에서 고려 태자는 뜻밖의 기연을 맺게 된다. 태자가 가는 도중 뭉케 칸이 댜오위산(釣魚山, 충칭 근처)으로 이동해서 남송과 전투를 벌이다 사망했고, 그 직후 뭉케의 두 동생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후계를 둘러싸고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누구를 찾아가 만날 것인가. 태자는 리우판산에서 뭉케 칸의 부음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마침 몽골 초원의 아릭 부케와 싸우기 위해 남송과의 전투를 서둘러 중단하고 북상하던 쿠빌라이를 만났다. 이 만남이 면밀한 정세 분석의 결과였는지, 그저 우연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향후 고려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 태자를 만난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이다. 옛날 당 태종이 친정했으나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내전을 앞두고 있던 쿠빌라이에게, 그것도 아릭 부케에 비해 정당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던 상황에서 30년 가까이 항전하던 고려 태자의 자진 방문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이 기쁨만큼 고려는 협상에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태자는 고려 국가와 왕실의 보존을 요구했고,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고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후 몽골 내전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하면서 태자에게 한 약속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고려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뒤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전쟁에 군대와 군량을 보내 도울 것과 고려 인구를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인구를 파악해서 군대·군량의 규모를 정하려는 속셈이었다. 협상을 통해 고려는 군대·군량 요구에는 응하되 그 규모는 자체적으로 정하기로 합의하고 끝내 인구를 알리지 않았다. 인구를 숨긴 것은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몽골 쇠퇴하자 곧 자주성 회복 1310년 몽골의 카이샨 칸이 보내온 국서(國書)에는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이 있고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은 삼한(三韓)뿐이다”라고 해서 삼한, 즉 고려가 몽골 중심의 천하에서 유일한 국가임을 인정했다. 이렇게 국가를 유지했기 때문에 몽골이 쇠퇴하는 기미가 보이자 공민왕이 곧바로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강대국과 적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존감을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외교에는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